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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모든 것의 시작

 왜 살고 있는가, 무엇을 때문에 살아가는가를 자기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대개의 경우는 권력자(정치가나 교사나 부모)에게 위임하고 그들의 말을 그다지 의심하지 않은 채 시키는 대로 기술과 지식을 몸에 익히는, 이것이 바로 노예적이며 기계적인 반복학습이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는지, 그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스스로 고민하고 판단할 수 있는 각자가 되어주길 바란다. 그것이 인문교양의 목적이다.

 

 

 토마스 만(Thomas Mann)

 정치행위가 만인의 것으로 변해버린 이상, 민주주의(Democracy)는 사실상 우리들 가자의 내부에서 실현되는 셈이다. 어떠한 인간일지라도 정치를 회피할 수 없으며, 정치가 각 사람들에게 미치는 직접적인 압력 역시 너무도 강렬하다. 지금도 여전이 종종 접하곤 하는 일이지만, "난, 정치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구식舊式'으로 비치는 것은 분명 참말일 것이다.

 이 같은 입잡은 단순히 이기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비열한 눈속임으로까지 비춰진다. 이런 태도는 정신적 무지함을 입증하는 것 이상으로, 윤리적 무관심가지를 입증한다. 정치적, 사회적 인식은 인간의 전체 삶 가운데 일부다. 그것은 인간이 풀어야 할 과제, 인간이 짊어져야 할 의무의 한 양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라도 이를 얕잡아보거나 업신여긴다면, 그 행위로 말미암아 반드시 인류에게 죄를 범하게 될 텐데, 죄를 저지른 당사자 쪽에서는 이러한 것을 가리켜 도리어 인류의 본질적인 모습이라 주장하면서 실제로 정치와 대립시키려 하고 있으니, 참으로 크게 웃을 노릇이다.

 그런데 일체의 만물이 의거하고 있는 본질적인 것이란, 다름 아닌 정치·사회조직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인간의 문제가 삶과 죽음의 구애를 받을 정도로 중대하게 제기되는 까닭은, 그것이 정치적 형태 아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천성, 그 숙명에서 보자면, 인류가 가장 위험하게 노출된 부임지赴任地에 처해잇는 시인時人, 이 시인이 교묘히 자기 태도를 바꾸는 그런 일 따위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해 산다. 인간은 짐승이 아니다.' 이 신념에 의지하며 살아온 인간이 자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 그것이 현대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잇는 이 시대인 것이다. 여기에 이러한 시대를 사는 우리의 '교양'이 어더한 것이어야 하는가하는 질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단정적인 답변은 아직 없다.

 

 현대의 '인문교양'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라고 물을 때, 그 질문은 사전적인 의미에서가 아니었다. '교양'이 무엇인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될 때 우리에게 던져진 그 질문의 의미는 결국 이 현대라는 시대를 우리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요컨대 어떻게 현대를 인식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나이든 분은 나이든 분 나름으로, 학생은 학생 나름으로 현대라는 시대에 대한 인식이 있을 터이고, 또 그런 인식이 응당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자신이 사는 시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있는 곳에 틀어박혀 안쪽만 바라본다. 외부에서 잔혹한 살육이 자행되고 있건 기아에 허덕이고 있건 간에, 나의 내부만 들여다보며 살아간다. 이건 '반전된 낙관주의(optimism)'이다.

 이렇게 한 곳에 틀어박혀 있는 자신의 정신 외부에 그런 참혹한 현실이 존재하고 있다 해도, 애써 그것을 못 본 체한다. 그게 평화라고 말이다. 밖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를 '아우슈비츠'에 비유하자면, 이는 자발적인 아우슈비츠, 소위 '역逆 아우슈비츠'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인가 - 프레모 레비

 

 

 일본의 경제적 풍요가 만들어낸 매력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로 단순히 보고 즐기는 관광이 아닌, 특히 구미 이외의 지역으로 떠나는 젊은이들의 여행이다. 예컨대 대학생들이 캄보디아로 가서 난민의 실태를 체험한다. 그런 젊은이들에게 큰 성원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지만, 동시에 이런 문제도 떠올리게 된다. 즉 해외에 존재하는 '타자'와의 만남이 가져다주는 자극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지만, 과연 좀 더 자신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타자와의 만남은 가능할까, 라고 말이다.

 가령 일본 도시의 노숙자들과 젊은이들의 '교류'가 가능한 일일까? 자신과 똑같은 사회의 성원으로서, 일단 똑같은 언어로 말하고, 용모나 자태도 별반 다르지 않은 인간의 비참함, 그 노숙자들의 초라한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는 어떤 저항감 같은 걸 품지 않을까? 그 저항감의 배후에는 언젠가 나도 저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공포심이 도사리고 있지 않을까? 해외의 '타자'는 이 같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지느 않을 것이다.

- 노마 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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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edited on 09/08/2007 22:41 by 여울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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